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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연중 제4주일이며 한국교회가 해외원조주일로 지내는 오늘의 복음말씀은 과거 진복팔단(眞福八端)이라고도 일컫던 일명 ‘행복에 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음이 가난하다거나 온유하다거나 박해를 받는다거나 하는 내용이 행복의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처지와 모습의 사람들에게도 하느님께서는 복을 베푸시리라는 일종의 ‘선언(宣言)’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서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며, 이에 반해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슬퍼하는 이는 하느님께로부터 벌을 받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물의 유무, 배부름과 굶주림,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고, 그 자체로 약속된 축복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무슨 축복이 왜 있느냐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시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과 같은 하느님의 시선에서 우리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임을 알려줍니다. 고통과 슬픔을 반기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자기가 겪는 고통을 담담하게 감수하는 것을 넘어 때로는 이웃의 고통에도 동참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진리를 헤아릴 줄 아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학생들에게도 자신의 미래와 꿈에 관하여 물어보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들 흔히 말합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나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경제적인 부유함을 죄악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이루고 싶고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따져본다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구원’이라는 미래를 이루는 데에 유익하기 때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의 복음말씀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더러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이유가 ‘하느님 나라’에 있듯, 하느님께서 약속하시고 베푸시는 영원한 축복을 원하는 마음이 없기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는 세상의 통념(通念)에 똑같이 갇혀있다 싶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는 내용이 아닙니다. 단순한 선언이고 축복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에서 멀어져있는 듯 보이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축복하시기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그들을 축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축복이 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이 그들을 위한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않아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을 바라고 얻으려고만 하는 삶을 가리켜 이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통념은 가난과 굶주림과 슬픔의 대부분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의 결과라고 말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이는 동시에 우리가 빌어주고 나누어주는 축복을 기다리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축복의 선언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을 다른 이들에게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마음이 가난한 자’로 비치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느님의 축복을 빌기보다는, 하느님의 축복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 축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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