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용지들을 정리하다 문득 싸악~ 스치는 느낌 뒤에 피 한 방울이 배어 나왔습니다. 알싸한 통증을 헤집고 나온 선홍색의 핏방울을 잠시 바라보며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흔히 병원에 가보면 혈액검사는 기본적으로 하게 됩니다. 적혈구나 백혈구뿐만 아니라 간장이나 콩팥, 심장, 갑상선, 당뇨, 염증, 탈수, 영양, 암 등등 관련된 수많은 의미 있는 지표들이 한가득 들어 있어서 건강 상태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생명의 보고(寶庫)인 한 방울의 피는 아직까지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헌혈을 통해 모아진 피는 긴급한 환자들에게 수혈을 통하여 바로 생명을 다시 살려내는 에너지원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께서는 너무나 고귀한 피를 숨이 다할 때까지 이 땅에 적셔주셨습니다. 이토록 귀하디귀한 순교자들의 피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하느님께 대한 지고지순한 순종과 사랑, 예수님께 대한 충성스러운 증거들이 그분들의 피 안에 고이 잉태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길고 긴 굶주림과 옥 안에서의 사투로 만신창이가 된 육신의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바친 이분들의 순교로 신앙의 씨앗은 고을과 고을로 한반도 곳곳에 뿌려져 신앙의 꽃이 피고 교회로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드디어 순교자들의 후손은 열 세대도 채 지나지 않아 이 땅의 사람들 열 명 중 한 명은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거룩한 순교자들의 혈세(血洗) 덕분이므로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교자성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흰색 순교라 불리는 땀방울 배인 희생과 봉사 그리고 희망의 열정이 우리 안에서 새롭게 일어나도록 순교자들의 간구와 정신을 청하게 됩니다. 일상 안에서 매일 걷고 있는 순례의 길을 나서며, 오늘도 두 손 모읍니다.
국우성당 주임 손기철(베드로 다미아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