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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 베케트라는 작가의 희극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삶이요 일상이 되어버린 두 늙은이가 평생을 기다렸으나 ‘고도’는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고도’는 하느님으로 볼 수 있고, 극중의 유일한 소품은 죽은 나무로서 하느님이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베케트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인생은 불합리하고 하느님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이 오실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고, 그래야 하느님이 오지 않아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그냥 무턱대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는 사람처럼(루카 12,35-36) 깨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깨어 기다린 종들에게 이제는 역할을 바꾸어 주인이 그들의 시중을 들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시중을 받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황송하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산 사람들은 주인이 왔을 때 주인의 시중을 받기는커녕 주인의 책임 추궁과 함께 그동안의 삶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깨어 기다리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깨어 기다리며 산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영적인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군대에서 군기를 잡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긴장이 풀어지면 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사격장에 가서 정신을 차리지 않고 긴장이 풀어지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운전할 때도 긴장하지 않고 딴생각을 하거나 졸면서 운전을 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긴장이 풀어지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영적인 긴장이 우리 자신을 지켜주는 것 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이 암으로 투병 중일 때 동아일보 기자가 수녀님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기자가 “암 투병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셨나요?”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삶에 대한 감사가 더 깊어진 것, 주변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 애틋해진 것, 사물에 대한 시선이 더 예민해진 것, 그리고 습관적으로 해오던 기도가 좀 더 새롭고 간절해진 것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수녀님은 암 투병을 하면서 영적으로는 더 긴장하게 되었고, 그래서 감사와 사랑과 기도가 더 깊어진 것입니다.  주님께 시중 받을 날을 기다리며, 우리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영적인 긴장을 유지하도록 합시다. 그것은 그동안 습관적으로 해 오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이해인 수녀님처럼 영적으로 다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감사가 더 깊어지고 사랑이 더 깊어지고 기도가 더 깊어질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 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월성본당 주임 박영일 바오로 신부

2019년 8월 11일 연중 제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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