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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 신비가 절정을 이루는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오늘 전례를 통해 우리는 두 개의 복음을 듣게 됩니다. 하나는 미사 전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때, 또 하나는 미사 중 ‘수난복음’입니다. 이 두 복음은 분위기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호산나”를 외치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옷을 벗어 길에 깔기도 하고 환호하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저주와 광란의 분위기로 반전되며 십자가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돌변하는 인간의 처사가 너무나 ‘우매하다’라는 생각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아를 정치적, 현실적으로 해방시켜 줄 분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당신 친히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심으로써 이를 통해 영원한 삶에로 인도해 주시고자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신 분이십니다. 크고 힘센 군마(軍馬)를 타신 것도 아니고 작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으로 ‘참 평화’를 암시해 주시고 또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기억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속담처럼, 겉옷과 올리브 빨마 가지를 길에 깔아놓고 흔들며 “호산나(구원해 주옵소서)”를 외치며 환호하던 사람들이 그리 쉽게 구세주를 십자가의 죄인으로 몰아가는 인정없고 폭력적인 무리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수난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이 십자가의 죽음에 일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과거사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은돈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제자(마태 26,15)

  ; 밀고, 배신, 청부살인, 인간이 사는 곳에 늘 함께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마태 26,35)

  ; 신앙 때문에 어떤 손해나 불이익이 생긴다면 언제나 등 돌릴 수 있는 우리들의 속내를 보는 것은 아닌지?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2)

  ; 깊은 철학, 신앙의 진리, 정의와 양심을 뒤로하고 구호에 따라 덩달아 춤추는 군중들의 모습은 우리와 무관하다 할 것인가?

    때로는 어떤 이의 참된 모습을 잘 모르면서도 선입견이나 남의 말에 단죄해 버리기 일쑤인 우리들의 삶 말입니다.
•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마태 27,24)

  ; 예수님의 죄 없음을 알고도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너희가 알아서 처리하여라.”하며 십자가에 매달게 내버려

    두는 작태는 과연 오늘날에는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진실 왜곡과 양심부재는 - “내 양심은 내 생애 어떤 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리라.”(욥 27,6)라고 말할 수 있는지 공정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도 “호산나(구원해 주옵소서)”를 외치고 있으며, 회개와 나눔을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이 실천과 결실 없는 빈 말에만 그친다면 ‘예수 사건(Christevent)’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며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 빨마 가지를 손에 들고 구세주를 환영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인류의 죄악을 속죄하시고, 무한하신 사랑으로 죄를 용서하심을 깨닫도록 합시다. 또한 이 성주간에 얼룩진 영혼의 허물들을 벗고, 작은 결점들을 고치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랑의 길을 걷게 되기를 바랍시다.

 

신암본당 주임 이상락 바오로 신부

2019년 4월 1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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