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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신앙은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신앙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스스로 신앙을 찾아 나섰고, 천주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자기 자신마저 기꺼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심을 알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와 대적하는데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여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녀차별이 있던 조선 시대에 천주교를 믿는다고 여자가 끌려오니 관장이 “너는 왜 왔느냐?”하고 모욕적으로 묻습니다. 여인은 조용히 대답합니다. “저 또한 천주님을 믿는 사람이니 국법대로 다스림을 받으러 왔습니다.” 관장이 언짢은 목소리로 묻습니다. “네가 믿는 천주가 도대체 어느 책에 적혀 있느냐?” 여인은 대답합니다. “저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어처구니없는 관장은 글도 모르는 게 와서 국법 운운하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글도 모르는 게 뭘 안다고 천주를 믿느냐, 너는 천주를 본 적이 있느냐?”하며 다그칩니다. 그러니 여인은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봐라! 글로 아는 게 있느냐, 본 적이 있느냐, 너는 뭘 가지고 믿는다고 큰 소리를 치느냐?”하고 관장이 아주 무시합니다. “나리, 제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말아야 할 것으로 말한다면 저는 이 나라의 임금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나리님을 보내셔서 오셨기에 저는 임금님이 계신 줄 믿나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있는 걸 보고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을 어찌 믿지 않겠나이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가장 개인적인 신앙은 저의 수호성인이신 정하상 바오로의 신앙입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아버지 정약종과 맏형 정철상이 순교하고, 유세실리아는 당시 일곱 살이던 정하상과 다섯 살 정정혜를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풀려납니다. 천주교 집안으로 몰락하면서 정하상이 겪어야 할 고초는 참으로 컸습니다만 그는 열심히 교리를 익히고 신앙생활을 하며 이 땅에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1816년 22살의 청년이 처음으로 마부로 위장하여 북경을 방문하여 사제를 요청한 이래, 1837년 조선 2대 교구장 엥베르 주교를 모시기까지 정하상은 21년 동안 9번 북경을 방문했습니다. 그동안 그의 노력으로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몇몇 신부가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엥베르 주교는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43세 총각 정하상의 인품과 신앙을 보고 그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교육하였으나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모두 순교하게 됩니다. 비록 정하상은 사제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성인이 되어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특히 보잘것없는 저에게 빛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 아래 생각보다 더 빨리 기쁜 소식을 안고 북한 땅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꿈꿔봅니다. 정하상 바오로가 걸었던 그 길을 말입니다.

 

위본당 주임 김성래 하상바오로 신부

2018년 9월 23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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