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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말세다. 이제 신부도 속지 않네.”

어떤 사람이 새 신부님과 면담하고 나오면서 이렇게 못마땅해합니다. 예전에는 가족 중에 누가 아프다, 무슨 딱한 사정이 있다고 하소연하면 새 신부님들은 잘 속았는데, 이제는 그들도 속지 않는다고사기꾼은 한탄합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도 많은 사제는 그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기도하고 속아줍니다. 혹시나 정말 그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이는 우리 교우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살다가 보면 세상을 잘 살아가는 방법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적 삶의 방식 안에서 우리는 갈등합니다. 성당 문밖만 나가도 무엇이 경제적인지, 어떤 방식이 더 효율적인지, 아니면 멋들어진 광고에 현혹되고 마는 우리이니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시각은 눈앞에 보이는 결과와 조금 덜 얇아진 지갑만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어디선가 이러한 이유로 상처받은 자신과 이웃의 모습을 발견하고 한숨지으며 하늘을 넌지시 올려봅니다. 우리 신앙인이 사는 세상은 단지 그러한 장소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다른 눈으로 세상을 대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기존의 세상 방식에 끌려가지 말고 그 너머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계신 하느님의 방식을 추구해 보라고 초대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물론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주고자 하기도 하셨겠지만, 이 대목은 세상에 통용되는 방식을 넘어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는적극적인친교의 실천 방법을 알려주고 계신 것은 아닌지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세상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 즉, 그분과의 친교를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모습은 자족하는 이들보다 오히려 한숨짓고 버려졌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낮은 자리에서 발견되었지요. 그들의 세상 생각과 달리 하느님께서는 낮고 고통받는 사람들과도 이미 친교하고 계시는 분임을 예수님께서는 깨우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세상의 눈높이를 거두고 주위를 둘러보면 부유하고 가난하고 높고 낮음을 떠나 버림받고 상처 입은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마땅하고 옳은 일이지 인간적인 어리석음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를 통해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친교의 움직임 안에서 우리 또한 나날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교구 사목연구소 부소장 | 최석환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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