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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고통스럽지 않다면 우리가 왜 순교자를 본받자 하겠습니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길 때면 발길이 저절로 한티의 순교자 묘역으로 옮겨지곤 합니다. 돌더미 속에도 무덤이 있고 비탈진 응달에도 무덤이 군데군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37기의 묘를 따라 순례길을 걷다 보면 골치 아팠던 일과 생각들이 조금씩 내려집니다. 무덤가에 소복이 피어난 구절초와 물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흩어진 옹기와 사기 파편들은 시간의 수레바퀴를 박해의 현장 속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대부분 이름도 성도 알 수 없지만 한티의 하늘과 땅은 여전히 그때 그분들이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니까요.

 

주님께서는 이 땅에 만 명이 넘는 순교자를 주셨습니다. 주님께 목숨을 드리는 것보다 더 큰 증거가 없기에 교회는 순교를 최고의 증거로 여깁니다. 순교자들은 단 한 분도 예외 없이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신 분들이죠. 주님께서는 오늘도 고통 앞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우리 마음에 거듭해서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주님을 따르고 싶은데 자기를 버리기는 어렵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기는 더 고통스러울 때, 앞서 이 길을 가신 순교자들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더구나 만여 명의 순교자들 가운데 팔천여 명은 주님 말고는 이름조차 모르는 분들이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곤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이 세상 것을 탐하지 않고, 하늘의 것 하나만을 탐하는 분들을 통해 매번 우리를 감동시키십니다. 우리와 똑같이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것을 탐하지 않는 그런 분들의 삶을 통해 당신의 현존을 강하게 드러내시니까요. 그런 분들을 보고 듣고 만나게 될 때 주님께 대한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곤 합니다. 한티의 순교자들도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순교하신지 이미 백오십 년이 지났지만 그분들이 사셨던 삶과 죽음 그리고 영생을 생각하면 흐트러진 삶이 다시 추슬러지니까요.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아직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것을 끊임없이 되묻도록 해주니까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가엾은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한티피정의집 관장  여영환 오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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