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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오늘 제1독서의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에로 돌아올 수 있도록 가르치고 충고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주시면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보초'로 세우신다고 합니다. 가르치고 지적하는 일을 맡기신다면, 이왕이면 선생이나 왕으로 세워주셔도 좋을 것을, 왜 하필이면 '보초'로 세우셨을까요?

   어떤 책임을 맡았다고 할 때에, 잘못하거나 실패하면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책임에 소홀한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장교가 작전계획을 잘못 짜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비록 최선을 다했지만 그 장교에게 책임이 있고 죄가 될 것입니다. 한편, 보초(경계근무)를 서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경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어떤 사고가 발생할 때에 그 죄를 묻게 되기도 합니다만, 보초를 서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죄가 됩니다. 근무지 이탈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맡게 되는 책임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져야 할 또하나의 큰 책임을 안고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책임’입니다. 그러면 이 책임은 최선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충고의 말씀을 들려 주시면서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을 수 있고 실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충고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자기내면을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때로는 본인보다 곁에 있는 사람이 더 잘 파악하고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고를 받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스스로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솔직한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에겐 모두 보초의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잘못은 지적 하고 고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남이 잘못되고 있는데도 충고하지 않고 바로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 또한 공범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무턱대고 모든 경우에 해당한다기에는 신중함과 지혜로움이 더 필요하겠지만, 불이익을 당한다는 이유만으로 틀린 것을 두고 충고하거나 악습을 고칠 수 있도록 돕기를 외면할 때, 그는 참된 신앙인의 길을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훌륭한 보초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손상된다 해도 겸손하게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 말을 다시금 기억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로마 13,8)

  이 사랑이 바로 ‘보초의 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강론준비를 하며 복음나누기를 하면서 동료 신부들과 이런저런 얘기, 강론자료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들었던 어느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왕이 낮잠을 자는데 왕궁 뒤에 있는 방앗간의 풍차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자 짜증이 생겼습니다. 화가 난 왕은 신하를 시켜 풍차를 부숴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들이 달려가서 그 풍차를 부숴 버리자 방앗간 주인이 나와서 "왕은 백성의 아버지인데 자녀들이 생업에 힘쓰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재산을 부숴 버리다니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며 한탄했습니다.

  신하들이 이 말을 왕에게 전하자 왕은 방앗간 주인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풍차를 다시 만들어 주었습니다.

  뒤에서 욕하지 않고 왕에게 직언을 전하는 방앗간 주인처럼, 그 충고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왕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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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 2020.09.06 15:03
    직언의 용기와 충고에 대한 겸손한 수용의,
    사랑의 삶을...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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