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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제게는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독일에서 살고 있는데요. 아직 결혼을 안 했습니다. 늦깎이로 공부를 마치고 현지에서 취직을 한 동생이 이야기하더군요. 월급을 받았는데 자신에게 부과되는 세율이 가장 높은 구간에 속한답니다. 그런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독신자’이기 때문이랍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사람에게 과세율이 더 높다고 하네요. 왜 그럴까요?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기르며 살아가는 것을 더 권장하는 것이 그 이유가 될 텐데요. 단지 인구감소에 대한 대비책이라고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제도가 합당하고 좋은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인의 중요성에 대한 현지사회의 인식이 묻어나는 대목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율법을 내세우면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시 율법에는 이유가 있다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10,4)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보면 좀 거시기합니다. 식사 준비를 안 한다거나, 집안 청소를 잘 못 한다던가 하는 사소한 이유도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사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린다’는 사실을 허락하는 것은 남편의 우월권을 비호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여인이 이전 남편의 권리행사로부터 자유로워져, 이후 자신의 사회적 삶의 기반을 찾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규정을 ‘남편의 아내에 대한 지배권의 표시’로 오해하거나 악용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0,9)는 말씀을 통해, 모세의 율법을 거스르는 것으로 매도(罵倒)당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단호한 대답을 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관계’라는 이 말씀이 부부간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필연적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의 창조질서, 생존질서, 혼인의 질서 등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지금 누군가와 만나게 되는 것이니, 이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 또한 자칫하면 하느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장 사랑하게 되는 자녀마저도 온전히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쉽지 않죠?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사람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와 존중의 대상’이 되어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음을 압니다. 혼인의 질서는 이 사실을 깨달으며 살아가도록 하신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음을 믿기에, 혼인생활 더 나아가 대인관계에서도 그런 하느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처신과 대우를 기피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우리가 신앙인답게 살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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