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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실 때에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그때’가 왔음을 직감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 13,31)

 

  그 아버지는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혼자 영광받으시고 예수님을 버리실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기에,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아버지께 대한 사랑을 배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라시며 당부하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사랑함을 드러내시고 하느님께서도 부활의 영광을 통해 예수님을 사랑하심을 드러내셨듯이, 하느님과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본당신부가 특정한 사람만 사랑하고 돌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여러분이 이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간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한쪽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기를 원하기는 하되,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기는 쉽되,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데에는 인색하기도 쉽습니다.

 

  이런 모습을 경계하며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도 같은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사랑하라’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주고받는 사랑으로 더불어 살기 위해, 예수님이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신 것처럼 내가 먼저 실행에 옮기고 보여야 할 ‘서로 사랑’이 멈춰져 있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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