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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가까운 ‘벗’은 내 고민을 들어줄 의논대상이기도 합니다. 갑갑한 심경을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신뢰감을 가지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좋은 조언자, 협력자,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벗’은 ‘종’과는 분명 다릅니다. 사극(史劇)에서 가끔 보면, 주인의 어린시절부터 항상 곁에 있었던 충직한 종은 그에게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며 가장 가까운 벗이 되고 때로는 스승의 역할도 합니다만,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고 봐야겠지요. 그 종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저 종일 뿐이지만, 주인에게 있어서는 남다른 사람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예외적인 경우가 우리에게서 일어나고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종이었던 이들을 가까이 두시고, 당신이 하셨던 일을 의논하고 함께할 동반자, 후계자로 삼아주셨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별볼일 없는 예수님의 종으로 보일지라도, 예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그분을 대신할 사람, 당신 사업의 후계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좋은 열매를 맺어 행복해질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사건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유일한 하느님이시고 한분뿐인 구세주이시기에,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어찌보면 고독한 분이셨습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께서 느끼신 고독함이 얼마나 쓰라렸겠습니까? 물론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만, 인간적인 감정으로 본다면 말입니다. 그 고독함의 쓰라림이 컸던 만큼 부활의 승리로 인해 비참함과 고독함을 이겨낸 보람, 감동, 기쁨도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기쁨을 우리와 나누어, 그 기쁨을 맛볼 동반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체험하지 못했던 기쁨을 우리들에게 맛보라고 건네주십니다. 주인이 먹는 잔치상의 음식을 종에게 먹어보라고 내밀고 계십니다. 그 기쁨이라는 음식, 먹어볼 만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처럼 기쁨을 맛볼 동반자가 된다는 것, 해볼 만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의 벗으로서 겪어야 할 고통을 이겨낼 때에 얻을 큰 기쁨, 부활의 기쁨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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