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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원수(怨讐) 혹은 귀엽게 말해서 ‘웬수’라고 부르는 존재가 있습니다. 원수란 한마디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역설적이게도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굳이 원한이 맺힐 정도의 상처를 주고받을 만하다는 것은 본래 거리가 먼 관계가 아니었다는 뜻일 테고, 용서나 화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상처의 굴곡(屈曲)이 여전히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는 내 가정과 직장, 우리 공동체,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버젓이 존재합니다. 과거에 ‘형제’였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는 ‘원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주님께서 바로 그 ‘형제’ 곧 ‘형제였던 사람’을 사랑하고 그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서로가)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마태 5,23)와 화해하고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어지간하면 풀었을 법한 관계조차 되지 못하니 화해하지 못했을 것이라 이해할 법도 한데, 이럴 때에 보면 예수님도 참 빡빡합니다. 더군다나 그 이유를 “너희의 의로움”(5,20)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마태 7,7)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해야 한다시니 할 말도 없고 말입니다.

 

  이때에 우리가 기억할 것은 ‘무조건 해 내라’는 갑갑한 명령이 아니라 그렇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지경까지 노력하면 함께해주시고 도와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사실 하는 데까지 다 했다 싶어도 도저히 해결방법이 없으면 다 집어치우고 싶거나 포기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러나 그때에야말로 진정으로 하느님께 간절히 도우심을 구할 때이기도 할 것입니다. 정작 이때에 우리는 내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께 힘입어서 ‘화해’이든 ‘용서’이든 혹은 그밖의 선행을 이루어내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정작 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을 때에는 이것이 쉽지 않죠. 힘을 다 빼야 하느님의 힘을 받을 조건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영성에서는 인간의 한계, 인간의 무력함, 인간의 부족함에 도달했을 때에 비로소 하느님께서 움직이시고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 보이기도 한다고 말하고,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기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 “주님,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 웬수를 위해 기도할 마음이 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당신께서 움직여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당신의 이름으로 저 웬수를 사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저 웬수에게 먼저 다가가서 인사합니다.”

  믿으면 이루어진다고 하셨으니,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기도하는 믿음과 간절한 매달림이 필요할 것입니다. 만약 이런 기도가 마뜩찮다면 아직 어깨에 힘이 덜 빠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당신의 완전성에로 초대하십니다. 주님의 더 큰 너그러우심과 관대함, 더 큰 사랑으로 무장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내 이름과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진실되이 행한다면 가능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기에, 그 표시로 그 말씀을 따르고자 오늘도 노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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