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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요한 10,32)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한 이유는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라고 하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33)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신적 본성, 즉 그분이 하느님이심은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듯 인간은 하느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에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하느님이 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고, 나중에 인간이 되셨으며,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당신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비천한 인간이 거룩한 하느님이 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편협하고 옹졸한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는 방편이 됩니다. 현실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나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겸양을 보이며 고사하는 모습은 언뜻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겸손을 가장하여 거절 혹은 회피하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떤 선택이 더 바람직한가의 여부를 떠나, 어떤 제안이나 요청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음이 역설적이게도 겸손을 가장한모습에 담겨있는 본질이기도 합니다.

 

  복음에서의 유대인들도 이런 속내를 드러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신앙인의 의식이 우리가 하느님 같을 수 없는 인간이듯 예수 당신 또한 비천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편협함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거짓된 겸손으로 알아보시는 예수님의 지적 앞에 그들은 분노하며 돌을 던지려고 함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단죄할 자격이 없는 죄인이 감히 할 수 없는 행위 곧 타인을 단죄하고 심판하려는 행위를 즉각적으로 시행합니다.

 

  행여나 온순하고 겸손하고자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진정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옹졸함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냥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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