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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교우들과 대화나 문답을 주고받다 보면 이런 주제의 이야기가 나올 때가 심심찮게 있습니다 : ‘제가 하느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때가 있습니다.’

  또 주로 아이들이나 예비신자들에게서 더 자주 보게 되는 모습인데, 성경을 읽거나 미사를 드리는 예식행위, 기도문 등의 내용 중에서 의문을 가지고 궁금함을 표현하시는 경우들도 종종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정말 편하게 얘기를 꺼내볼 수 있는 가벼운 에피소드일 법도 한데, 정말 어렵게 얘기를 꺼내시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느님을, 그분께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온전히 믿습니까?

 

  ‘호기심’, ‘궁금증’ 같은 것들이 생겨도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는 것 같아 죄짓는 느낌을 가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의심’(의구심)이 들어서 뭔가 미지근해지기 쉬운 자신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부끄러워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도무지 믿을래야 믿을 수가 없다면서 ‘의혹’을 제기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혹시 온전히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때 내 모습은 어떤 경우에 해당할까요?

 

  ‘호기심’은 개인적 성향에서 비롯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관심없는 것에는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알고 싶은 지적 욕구이든, 신기한 것에 끌리는 본능의 자극 때문이든 ‘긍정적 관심’이 있어야 궁금증도 생기고 호기심도 발동합니다.

  ‘의심’은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마음’이라고 사전적으로 말합니다. ‘틀렸다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인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접하는 상대방의 논리에서 근거가 부족함을 느끼든, 그 논리를 이해하기에 나의 지식이나 경험 등이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일시적으로 의구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온전히 믿고자 노력하는 신앙인이라면 같은 의구심의 반복 속에서 벗어나 확신을 갖기 위해, 더 배우고 더 신뢰심을 가지고자 하는 노력은 할 필요가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의혹’은 ‘수상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문제가 있거나 논리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훨씬 강하다는 뜻입니다. 전교하려고 할 때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가족이나 이웃, 혹은 내가 신앙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픈 유혹에 넘어갈 때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신앙의 멍에를 회피하고 싶을 때에 주로 이렇게 ‘의혹을 제기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도 곧바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직접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뵈었을 때, 그는 주님 앞에 곧바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흔히 의심을 품는 신앙인 혹은 회의론자로 묘사되는 토마스 사도이지만,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거부한 사람이 아니라, 확신을 가질 근거를 필요로 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는 근거없이 막연한 믿음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神祕)라는 말처럼, 하느님은 그 자체로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존재, 인간에게는 감추어진 존재입니다. 바꿔말하면 인간의 능력과 지성으로는 온전히 밝혀내고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나의 능력과 근거 안에서만 하느님을 이해하려 든다면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서는 ‘믿어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반대로 의혹을 가지거나, 믿음을 강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은 ‘내가 알 수 있고 인정할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학적 사실이나 논리 등을 근거로 그에 부합하지 않거나 설명되지 않는 신앙의 신비를 모순적이라거나 속임수라고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믿음을 거부하는 자신의 근거를 반박할 수 있는 다른 믿을 만한 근거를 들이대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과학적 사고를 기르는 청소년 시기의 자녀들이 학교교육에서 들은 내용 - 심지어 교사의 개인적 견해 - 을 바탕으로 무신론적 주장을 펼치며 성당가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자녀의 주장의 핵심은 결국 ‘성당가기 싫다’입니다.(싫다는 것은 개인적인 주장이지, 당위성이나 논리의 대상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보이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 그 사실을 아쉬워하고 부족한 믿음을 채워가기 위한 노력의 차원에서 겪는 ‘궁금증’, ‘호기심’, ‘근거를 찾고 싶어하는 마음(의심)’은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모습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시기에 스스로 온전히 믿기 어려워하는 교리의 내용이나 교회의 규정, 관습 등을 두고 강한 거부감을 가지면서 그런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앞세운다면 온전히 믿기 어렵다 느끼는 마음 속에 ‘의혹’을 품고 사는,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이는 신앙인으로서는 안타까운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믿지 못하는 자신을 방치하지 않고 믿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 그것이 ‘보지 않고도 믿는 자의 행복’을 약속받은 우리에게 어울리는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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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미란 2020.04.19 08:20
    알렐루야!!! 아멘!
    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힘이 되고 길잡이가 되어주는 말씀 새롭게 깨우치게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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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다 2020.04.19 10:53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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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el 2020.04.19 10: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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