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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사람이라면 저마다 살아가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하고, 크고 작은 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고해소에서 자주 듣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기도 하고, 그래서 위로가 되는 말이나 충고를 해드리기도 합니다만, 어떤 경우에는 그 어려움에 대해 공감하기보다는 한숨과 눈물이 섞인 고해를 들으면서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없이는 보람도, 영광도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십자가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고통 없이 부활의 영광도 얻을 수 없다는 믿음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대로 사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져야만 하는 십자가라고 받아들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를 들먹이며 얘기하고 나서 고해를 끝내면 기운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고해소에 들어오기까지 용기를 내고 어렵게 어렵게 찾아올 교우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고해를 듣고 진심으로 위로하는 것을 부담으로 여긴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고해를 들으려 노력하면서도 때로는 습관적인 위로의 말을 건네는 잔머리를 쓰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 고통과 시련을 참고 잘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면 할수록 더 편하게 사는 법, 대충대충 문제를 비껴 넘어가는 법, 어려움을 해결하는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 눈에 더 잘 보입니다. 그래서 ‘수월한 방법을 두고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고, 이른바 잔머리만 굴리는 때가 많아집니다.

 

  오늘은 진정으로 끝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랐던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던 성인들과 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성인들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배교하기만 하면 나라에서 중용할 것이라고 꼬드김을 받았던 김대건 신부님이나 그밖의 학자들, 목숨을 잃고나면 아무리 믿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협박에 하느님만을 믿겠다고 용감하게 대답하던 순교자들도 ‘입으로만 배교하고 살아나가서 더 열심히 믿고 전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잔머리 정도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그 마음에서 버리고 산다면, 그것이 믿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편안한 길, 넓은 길, 지름길을 두고 멀리 돌아서 천천히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을 가슴에 품고 죽는 것이 더 올바른 길이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속에 항상 하느님을 모시고 살기 위해 온갖 수고와 불편함을 감내할 수 있는 자세가 바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모습입니다. 혼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믿음과 공경의 자세로 당당하게 성호경 한번 그을 수 있고 자신의 신앙을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될 때,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데에 잔머리 따위는 쓰지 않는 용감하고 성실한 순교자의 후손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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