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큰 괴로움 속에서 견디어 내시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을 거부하고픈 유혹을 이겨내시는 것을 뵈면서 사순 시기의 영적인 자세를 성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맞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인간, 아담도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죽지 않는다’고 유혹한 그 악마가 아들이신 예수님을 다시 유혹합니다. 죽지 않으려면 돌더러 빵이 되게 하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빵을 만들어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증명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굶주리는 군중들을 위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증명하십니다.
악마는 힘을 숭배하라고 유혹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도달하고 성취하였으니 스스로의 위대함을 추앙하라고 유혹합니다. 우리 안에서 쉴 새 없이 우리를 흔듭니다. 성공은 내가 노력해서 도달한 나의 몫이라고 말입니다. 나 자신을 앞세우고 다른 이를 깔보고 함부로 대하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유혹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가 악의 자녀라면 악마는 유혹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흘러갈 때 우리는 시험당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절박할 때 악마는 유혹합니다. 빈틈을 잘 찾고 그 빈틈을 잘 공략합니다. 악의 유혹은 그림자와 같이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예수님도 유혹받으십니다. 왜 이 고통이 주어지는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마르 15,34) 악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도 유혹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
우리는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하느님께서 지금 내 곁에 계시는지 두려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싸와 므리바에서 하느님을 원망하였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인도하신 길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길은 그들을 시험하여 단련시키는 길이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을 낮춥니다. 그리고 낮추어진 사람만이 광야라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 자비를 청할 수 있고 자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순절, 40일의 시간은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시간입니다.
상동성당 주임 신종호(베네딕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