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복음으로 들은 오늘 말씀에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 마태오복음은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마태 17,2)라는 말로 예수님의 달라진 얼굴 모습을, 그리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라는 말로 달라진 외관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 앞에서 “당신께서 참으로 성부의 빛이시라는 것을” (『가톨릭교회교리서』 555항 참조) 드러내신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이 이야기가 없다. 보통 사건이 아닌데도 말이다. 왜일까? 사실 요한은 복음의 시작에 이미 예수님께서 ‘빛’이심을 선포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그러니 복음서 안에서 굳이 이날의 일을 또 말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한편, 예수님의 빛나는 이 모습은 인간의 죄 때문에 기꺼이 받으실 수난과 죽음 이후에 되찾을 영광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일이 있기 직전에,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는 말씀으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예고해 놓으신 상태였다. 이날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누신 이야기도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에 관해서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의 길은 당신 혼자서만 가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따라오라시며 같이 가자고 하셨다.
그런데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베드로는 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 초막 셋을 지어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루카 9,33)라고 말한다. 초막이 무엇이던가? 초막의 구조는 지붕까지 있어서 사람이 장시간 거주하고 안주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여기에 초막을 짓고 싶다는 베드로의 말은 딴 건 모르겠고 지금이 좋으니 그냥 현실에 눌러앉고 싶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에 담긴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이날 이렇게 눈으로만 보는 즐거움에 그쳤던 베드로는 예수님 수난의 시간에 그 나약함을 드러내었다. 그는 수난과 십자가형이 있던 날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았다.
나는 왜 주님을 믿는가? 어떤 마음으로 성당에 다니는가? 무엇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더 많이 벌어 안락하게 이곳 현세에서 안주하기 위함이라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우리의 초막은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고 하신 영원한 천상 거처에다 지어야 한다.
송현성당 주임 이성호(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