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기도에 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시작과 해결은 바로 ‘소통’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표현할 때조차도 소통의 한 방편으로 본다면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람 사이의 대화도 어려운데 하느님의 대화라니... 신과의 소통이라니!!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는 ‘관계에서 오는 만남’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가 고민이기도한데 1독서가 그 해답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1독서의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대화합니다. 성조 아브라함이라고 무슨 대단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독서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그냥 속타는 자기 얘기입니다. 주님은 모두 인내롭게 들어주시고, 청하는 대로 받아주십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느님 존재>를 전제로 하고 <편하고 부담 없이 자기 맘속 얘기를 가감 없이> 하느님께 말을 건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난 뒤에 결정과 선택은 모두 하느님의 몫입니다. 근데 왜 우리는 기도를 어렵게 느낄까요? 내 기도를 듣는 하느님이 계실지언정 그분은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예 내 얘기에는 관심이 없으시겠지, 하고 단정해 버리니 기도가 안되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현존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이것이 어쩌면 기도의 시작입니다. 그분의 현존하심, 나와 함께 계심, 이라는 것만 터득하게 되면 기도는 쉬워집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려고 마음을 먹는 ‘바로 그곳에’ 하느님은 현존하시고 우리의 맘속 고통과 걱정을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 기도를 들으실까라는 질문은 그분 신뢰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 부분은 복음에서 답을 얻어볼까요?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7) 모든 조건이 안좋은데도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이유는 저 문 안의 친구를 믿기 때문입니다. 굳게 닫힌 문이 마치 벽처럼 느껴질지언정 ‘문 반대편에서’ 하느님께서는 내 생각과 느낌,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까지도 모두 듣고 계십니다. 우리가 말로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만으로도 우리에게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그렇게 이미 내가 청하기도 전에 나를 가장 잘 아시고,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난 끊임없이 ‘청할 것이고’, 그분을 부단하게 ‘찾을 것이며’, 하느님 그분 마음의 문을 하염없이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청하여라, 주실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루카 11,9 참조)
칠곡성당 주임 장희만(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