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셋 있었습니다. 하루는 임금이 그를 왕궁으로 오라고 불러들였습니다. 두려움을 느낀 그는 친구들에게 함께 가 줄 것을 청했습니다. 늘 소중이었던 첫 번째 친구는 ‘함께 가 줄 수 없네’하고 거절하였습니다. 정답이었던 친구는 왕궁 입구 앞에까지만 가 주겠다고 했습니다. 천더기 친구는 ‘기꺼이 함께 가 주겠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 앞에서 곤란한 일이 생기면 변호까지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 앞에 불려갈 때, 죽음의 심판 앞에 도움을 청한 첫 번째 친구는 재물이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겠다는 친구는 자선이라고 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은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저자는 왜 밤낮으로 온갖 지혜를 짜내어 일한 그 모든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허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는 염세주의자나 허무주의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수고한 보람도 없고 결과도 없이 끝나는 인생을 돌아볼 때, 정말 허무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세적인 것들을 얻으려고 힘쓰지만, 말 그대로 폭망하고 마는 인생일 수도 있습니다. 허무한 삶 속에는 이런 불순물이 끼어듭니다.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 거짓말, 이것으로 점철된 삶은 옛 인간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새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 삶 속에는 생명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유산에 관한 중재를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라고 오히려 주의를 당부하셨습니다.
누군가 영혼의 무게를 21g이라고 했던가요? 단 한 가지, 영혼은 가볍디 가벼운 것, 그 가벼운 영혼으로 무엇을 들고 갈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것을 찾아가실 때,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가고 맙니다. 일반적으로 돈으로 대표되는 재화는 금속, 의복, 식량 등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녹슬거나 좀먹거나 썩거나 도둑맞거나 해서 축나는 것들입니다. 나의 수확, 내 모든 곡식과 재물, 내 창고, 자신을 위해서 마련했지만 부자는 하느님 앞에서만은 부유하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세상의 부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나눔이라는 영적인 풍요로움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사 전체는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특징으로 합니다.”(『복음의 기쁨』 197). 하느님 없이 살아 ‘세상 참 허무하
네’라고 말하며 어리석게 끝내시겠습니까?’
연일성당 주임 김봉진(안드레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