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또 기다리는 편지’라는 시(詩) 중에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문학이지만 삶이 담겨 있어야 공감할 수 있기에, 그것이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라면, 엄청난 말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을 행복이라고 느낄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리고 만남에 대한 희망이 가슴속에 살아있다면, 어쩌면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행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믿음은 기본입니다.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기다림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만날 희망이 전혀 없다면 그 기다림은 절망을 낳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나아가 사랑이 없다면, 아니 사랑이 계속 살아있지 않으면 그 기다림은 단지 마음이 식어가고 지쳐가는 시간이 될 뿐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과 희망이 없는 기다림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면 그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요, 아프고 힘든 일이 될 뿐입니다. 애인을 기다리는 것도, 산모가 아이를 기다리는 것도, 부부가 서로의 성을 기다려주는 것도, 부모가 자녀의 성장을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과 사랑이 있기에 기다릴 수 있고 그 기다림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위해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그런 준비의 노고들이 불행이나 아픔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희망과 진정한 사랑은 나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희망을 품고 진실로 사랑하고 있으면 나의 노고와 수고, 나의 애씀과 인내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런 위대한 경험을 한 번쯤 다 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참 쉽지 않습니다. 보이는 사람에 대한 만남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도 어려운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해 그러기는 더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 준비라는 것이 신앙의 가치를 살아내는 일인데 그것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손해 보고 어리석다고 생각되는 게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더 많다면 희망과 사랑에 대해 스스로 확신이 없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과의 만남을 향해 나아가는 이 신앙의 삶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희망과 진실된 사랑을 지녀야 할 겁니다. 신앙의 삶을 살면서 내가 먼저 행복해야 세상도 행복한 것이고, 그래야 내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으로 인해 주인을 만나는 그 순간만 행복한 종이 아니라 그 기다림의 시간 역시 행복으로 여길 수 있는 그런 희망과 사랑을 품은 우
리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소화성당 주임도희찬(대건안드레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