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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어린 시절,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선생님이나 교수신부님께서 일찌감치 시험범위를 가르쳐주십니다. 공부하기에 게을렀던 저는 시험범위는 기록해두지만 미리 공부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지런한 동료들이 미리 공부하다가 분량이 지나치게 많다거나 내용이 어려워 하소연을 하게 되면, 시험범위가 줄어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여나 시험범위가 줄어든다든지 확정이 되었다 싶으면 그때부터 시험공부를 합니다. 요령만 가득했던,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러나 누군가가 저더러 요령만 부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면 내심 조금은 서운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험준비를 잘 해 둔 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소에 강의내용을 어느 정도는 잘 정리해두고, 필요한 자료도 제법 모아두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학습상태를 시험으로 평가받고 그 결과로 입증하지만, 교과의 학습은 평소에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보다 효율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또 그만한 결실을 얻기 위해서 이런 요령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요령만 부린다면 낭패를 볼 일도 분명 있겠지요. 요령만 부린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받아들 결과에만 집착하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표인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도 이런 요령만 가득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경우는 없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계시는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음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어디에 올 것인가’에만 골몰하고, 그 때와 장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면서 정작 지금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며 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에는 소홀한 사람들의 헛된 믿음과 집착, 예수님께 대한 몰이해 등을 질타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어디에 나타나거나 완성되든지 상관없이 하느님의 나라에서처럼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 ‘때와 장소’를 몰라도 큰 불이익이나 지장이 없을 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평소에 착실하게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면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아들게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만 주목하느라 지금의 성실한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 또한 단지 요령만 가득한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기울일 노력에 있어, 지나치게 요령에만 매달리듯 신앙을 지키며 살 수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이후의 어느 시점, 나중에 당도할 어느 장소에서나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요령을 부리다가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이 말씀이 전혀 이해도 되지 않고 당황스러운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요? 기도도 나중에, 선행도 다음에, 희생과 봉사도 다른 곳에서 하면 문제없다는 생각에 빠져, 지금의 삶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하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기를 게을리하지는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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