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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는 예수님의 제안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4,20) 나선 사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안드레아 사도를 비롯한 네 명의 어부 출신 사도들은 어떻게 ‘곧바로’ 응답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시절에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직후에도 사도들은 계속 예수님을 따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순간만큼은 이런 고민의 흔적이 없습니다. 복음은 사도들이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고 전함으로써 이와 같은 사실을 짐작케 해줍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사도들에게서 본받고자 힘써야 할 부분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세상살이 중에 고민(苦悶) 하나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크고 작은 고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민에도 각기 다른 부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선택의 고민이 있는 반면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행위의 고민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차피 할 것이지만(혹은 하지 않을 것이지만) 하기가 싫거나 부담스러워서 계속 고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 모습은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이나 공동체의 요청을 받아들일 때에도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고민 속에는 핑계거리’ 곧 ‘하기 싫은 이유’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후에 행동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신중한 고민과 점검 후에 이루어진 선택은 확신과 더불어 힘을 불어넣어 주지만, 이렇게 소모적인 고민 후에 얻어진 선택은 사람을 소극적이거나 마지못해 일하게 합니다. 그 능률이나 기쁨도 반감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왕 해야 할 것이라면 일이 되게끔 하려는’ 사람은 선택에 많은 힘을 소진하기보다는 선택한 것에 최선을 다하기 위한 고민’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도들처럼 말입니다. 어차피 모든 일이 순조롭기만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며, 하느님의 뜻을 지키며 사는 데에도 여러 난관과 유혹이 있기에 고민거리가 없을래야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고민하는 것은 일하는 과정에서의 시행착오까지도 온전히 자신을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실수와 시행착오와 상처를 발판 삼아 더욱 지혜롭게 일할 수 있는 자산(資産)을 얻게 해주며, 영적인 성장으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이 곧바로’ 응답하는 모습을 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동시에 우리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즉각적인 순종’이 가지는 미덕이 바로 이와 같음을 떠올립니다. 사도들이 버린 그물은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최소한의 버팀목이며 안전자산(安全資産)이기에 이를 고민없이 버리는 모습은 성급하거나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를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궤뚫어보았다면 고민은 예수님을 따라나선 후에 해나간다는 사도들의 태도는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 곧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떤 봉사나 영적인 행위를 해나갈 기회가 있을 때에 망설이는 것을 고민한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망설여질 수 있지만 그 망설임에 너무 오래 머무르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부르심’을 하느님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부르심과 요청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고민해나갈 때, 요청에 화답하고자 고민할 때, 고민하는 무거운 마음에서 벗어나서 주님께서 베풀어주실 더욱 큰 선물을 받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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